'망하기 직전에 최고 물건 만든다'는 역설 있는데

‘가장 아름다울 때 순식간에 지더라’는 말이 있다. 망하기 직전의 기업이나 나라가 반짝 광휘를 발휘할 때가 있다는 말이다.

미국의 사진 평론가 마이크 존스턴은 카메라 렌즈로 이런 현상을 말했다. 4×5인치나 되는 대형 필름으로 사진을 뽑아내는 대형 카메라에서 최고의 렌즈가 나온 시기를 그는 2000년대 중반으로 꼽았다.

인류의 사진 역사상 카메라 렌즈로는 최고의 영상을 뽑아낼 수 있는 명작이 이때 탄생했지만 이미 세상은 디지털 카메라 시대로 넘어간 뒤였다. 이래서 ‘사상 최고의 렌즈’는 그 최고 품질에도 불구하고 눈길 한번 못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한탄이다. 


몰락 직전에 광휘 뿜어냈던 유럽, 미국…, 그 다음은?

'몰락 직전의 반짝 광휘'라는 역설은 여러 사례에서 볼 수 있다. 

1·2차 세계대전 이전만 해도 유럽은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초강대국들이었고,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전만 해도 미국은 부시 전 대통령이 일방주의를 밀어붙이며 영원한 1등을 할 것만 같았다.

미국 애플이 만든 ‘아이폰’ 전화기 한 대가 한국의 이동통신 시장을 하루가 다르게 바꾸는 모습을 보면서 ‘몰락 전 반짝’ 역설이 계속 머리에서 감돈다.

미국이 만드는 ‘물건’이 보잘것없고 제조업 분야에서 한국·일본에 판판이 깨진다고는 한다. 그러나 영화 ‘아바타’, 그리고 아이폰을 통해 보여준 그들만의 장점은 아직도 남아 있다.

한국 같은 폐쇄 사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들만의 기발한 창조성,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정말 딱딱한 한국 사회-기업, 소프트 세계에서 설 자리 있나?

유일 초강대국이던 미국의 헤게모니 배경에는 물론 무시무시한 군사력이 있다. 그러나 세계인이 꼭 미국의 ‘큰 주먹’에 놀라 무릎을 꿇은 건 아니다. 미국 문화에, 할리우드 영화에 매혹돼 자발적으로 무릎에 힘이 풀린 경우도 많다.

이건 마치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가 만드는 물건도 뛰어나지만, 그가 새 제품을 프레젠테이션하면 세계 언론이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돈 한 푼 받지 않고 대대적 '광고'를 해주느라 안달을 떠는 현상과도 비슷하다.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는 힘이다.

그리고 이런 능력의 바탕에는 미국 문화의 독특한 ‘너도 나도 모두 그저 같은 사람일 뿐’이라는 철학적 바탕도 있다. 미국의 파티 같은 데 가면 수입과 지위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남녀노소가 서로 이름(퍼스트 네임)을 부르며 스스럼없이 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 앞에서는 너도 나도 그저 사람일 뿐이기 때문에, 비록 직장에서는 하늘 같은 상사라도 사석에서는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날 수도 있다는 장면이다. 논문으로 바쁜 대학원생을 대신해 교수가 심부름을 해주는, 지상 최고의 권위주의 국가 한국에서는 그림도 그려지지 않는 광경이 펼쳐지는 이유다.

하버드 졸업생을 ‘미스터 하버드’라고 부르며 우대하지만, 그렇다고 비(非)하버드 출신을 모두 바보·멍청이로 여기지는 않는 사회, 실패하더라도 두 번째, 세 번째 찬스를 주는 부드러운 사회이기 때문에 ‘소프트 파워’로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미국이 소프트웨어 지배하는 이유

‘물건’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일본도 아직 컴퓨터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그저 미국을 따라갈 뿐이다. 미국에서 소프트웨어가 나오면 그걸 돌리는 기계를 만들어 팔아먹는 수준이다. 물건만 잘 만들다가 궁지에 몰린 사례를 우리는 최근 일본 자동차의 위기에서 확인한다.

아이폰에서 볼 수 있듯 세상은 이미 ‘소프트’ 쪽으로 패러다임이 넘어갔는데, 한국은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핸드폰·LCD·반도체·선박을 만든다”며 입이 귀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요즘 한국 경제를 비추는 햇살은 너무 아름답지만, 바로 이 햇살이 망하기 전의 그 반짝 햇살은 아닐까라고 의심되는 것은 지나치게 걱정 많은 사람의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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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 시각에서 침략군(미군) 보는 내용"이란 시각은 완전 오해


원주민을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모두 백인이라야 한다는
'철저한 백인우월주의' 표현한 영화라는 사실 알아야




영화 ‘아바타’가 부시 직전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을 비판하고, 반전 논리가 좀더 센 민주당을 지지하는 내용이라는 지적이 미국의 보수주의자들 쪽에서 나오는 모양이다.

이 영화를 보면 지구의 군인들이 판도라 별의 원주민 나비 족을 공격하면서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를 언급하니, 이런 분석도 아주 틀리지는 않다. 원주민을 압도적 화력 차이로, 신무기로 괴멸시켜 버리는 ‘지구 정복군’의 모습은 바로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군의 모습이다.

민주당 식 논리지만 '미국이 최고'엔 변함없어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서는 ‘지구인과 행성 판도라의 원주민 나비족과의 대결 구도인데, 나비 족 시선에서 영화가 진행된다’(한겨레신문 1월7일자 ‘아바타 색깔 논쟁’ 기사에서)는 평가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평가에 대해서는 반론을 펴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가 ‘나비족 시선에서 진행된다’는 것은 완전한 오판이다. 반대로 이 영화는, 비록 민주당, 즉 미국식 진보주의자의 입장에 섰다고는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나비족(원주민)의 입장이 아닌 정복군(미국)의 입장에서 풀어나가는 이야기다.

평화롭지만 미개롭게 사는 원주민이 있고, 이들이 사는 땅 밑에 엄청난 자원이 묻혀 있다. 정복군은 평화 작전으로 이들을 설득해 주거지를 옮기라고 설득하려 하지만 미신적 신앙에 집착하는 원주민들은 말을 듣지 않고 정복군은 몰살 작전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정복군에 속했던 일부 ‘양심 세력’이 정복군을 배반하고 원주민 편에 서면서 용감하게 싸워, 정복군의 야욕을 물리친다는 것이 영화 ‘아바타’의 내용이다. 이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 원주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둔하다’. 혼자 힘으로는 정복군의 막강한 화력을 막아낼 수 없으면서도,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에도 기도나 드리는 멍청한 짓을 한다.

그러다 마치 ‘신이 하늘에서 강림하듯’ ‘마음을 바꿔 잡수신 백인 영웅’이 나타나, 지리멸렬한 원주민 부족들을 결합해, 정복군을 물리쳐낸다. 원주민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미국인의 환상이며, ‘정복도, 구제도 모두 백인만이 할 수 있다’는 백인우월주의의 시각이다.


한겨레신문의 평가처럼 이 영화가 ‘나비족 시선에서 진행된다’면 스토리가 이렇게 전개될 수는 없다. 나비족을 구하는 영웅도 나비족 안에서 나와야지, 왜 ‘개과천선한 정복군 변심자’가 필요하단 말인가.

'개과천선한 일본군 변절자' 나타나지 않았다면 조선 사람은 구제불능?


이런 논리를 따르자면, 그러면 이라크 사람들의 도탄을 구해낼 수 있는 것은 이라크의 영웅은 될 수 없고, ‘개과천선한 용감한 미군’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좀 더 한국인 심리에 근접하게 말하자면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는 무지몽매한 조선 사람을 구할 영웅은 조선 사람 안에서는 나올 수 없고, 개과천선한 일본인 영웅이 나타나야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 부분에서 저는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이란 그 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과천선한 일본군 변절자'가 없었으면 정말 한국 민족은 구제불능이었을까요?)

그간 미국 역사를 보면 전쟁을 좋아하고 내놓고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보수주의 공화당이었지만, 그렇다고 진보주의 민주당이 무력 사용을 자제했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제2의 6.25가 일어날 뻔한 시점이 최근세사에서 두번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것은 모두 민주당 출신의 카터 대통령과 이른바 1차 북한 핵 위기 때의 클린턴 대통령 시절이었다. 

민주당은 공화당에 비한다면 좀더 평화주의적인 면모를 띠지만(클린턴이 북한 침공 일보 직전까지 갔으면서도 동시에 북한과 대화를 했듯), 필요하면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킨다는 미국적 생각에서는 사실상 공화당과 큰 차이가 없다.

'아바타' 같은 영화 보면서 헷갈리면 바보 된다 

할리우드를 지배하는 것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지만 ‘백인 영웅만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이들의 백인우월주의는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이 만든 영화에서 끊임없이 변용돼 나타나는 기본 주제다.

‘아바타’ 같은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는 원주민 시각에서 풀어나가는 영화’로 생각하는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한 마디 적어 보았다. 이렇게 보는 시각이 바로 ‘아둔한 원주민’의 한 전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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