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관심-비난으로 선수들 기죽이는 한국 문화에서
히딩크가 문연 '서양식 리더십'이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뿌리내리면서 사상 첫 원정 16강 이룬 것. 
 




중앙일보 6월 24일자는 1면 톱으로 한국 팀을 16강으로 이끈 박지성의 ‘비움의 리더십’을 다뤘다. 이 기사를 보니 2002년 히딩크 감독 당시의 일화도 생각난다.

히딩크가 보기에 당시 국가대표팀의 선후배 관계는 너무 엄격했고, 그래서 히딩크는 “지금부터 무조건 반말”을 지시했다. 김남일이 홍명보 주장에게 “명보야, 밥 먹으러 가자”고 했다는 얘기는 지금도 유명하다.


르헨티나에 대패한 다음 날, 박지성의 리더십… "형은 달라"

그리고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주장 박지성은 아르헨티나에게 대패한 다음날 굳어 있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일일이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후배들에게 농담을 건네 분위기를 바꿨다고 한다. 박주영은 박지성에 대해 “형은 친구처럼 느껴질 정도로 스스럼없이 대해준다”고 말했다.

2002년과 2010년의 이 두 일화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히딩크나 박지성이 하는 방식이 바로 ‘서양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박지성은 오랜 영국 생활을 통해 익혔을 것이다.

서양식 상하관계를 많은 한국인이 오해하지만, 존댓말이 없다고 해서 그들의 관계가 이른바 ‘야자 타임’ 식은 아니다.

윗사람은 지시하고 아랫사람은 따르는 상명하복이 서양에도 있지만, 그 근본에는 합리주의·원칙이라는 게 있다. 이런 원칙만 지켜지면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친구처럼 지내도 좋다는 게 서양식이다.



한국의 '공포를 기반으로 한 통치' 방식이 효과적일 때도 있지만 

물론 한국식, 즉 ‘윗사람은 책임감을 느끼며 찍어 누르고, 아랫사람은 입 닥치고 무조건 복종하는’ 방식이 반드시 나쁘다는 건 아니다. 때로 이런 방식은 엄청난 돌파력을 자랑한다. 한국인이 잘하는 ‘돌관 공사’(1년 걸릴 공사를 단 몇 개월에 해치우는)는 한국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이제 경제든, 운동이든, 옛날식으로 ‘선수들을 시멘트 바닥에 갈아대 처벌하는’ 방식으로는 이끌어 나갈 수 없다. 특히 스포츠는 ‘재미있고 진지하게 논다’는 유희성이 없으면 성립이 되지 않는다.

한국이 지난 월드컵들에서 수없이 고배를 마실 때 어떤 외국인 비평가는 “한국 선수들이 ‘국민의 과도한 기대감’이라는 중압감 없이 가뿐하게 뛸 수 있다면 더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생각해보자. 온 국민의 시선이 당신의 발을 쳐다보고 있고,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가차없이 비난이 쏟아질 준비가 돼 있는 상태에서, 당신이라면 발이 얼어붙지 않겠는가를.




민주주의 자리 잡으면서 "나만 원칙대로 하면 돼" 더 확산돼야 

지난 동계 올림픽 때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앞두고 미국인 해설가들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연아가 한국인의 기대에 못 미치면 그녀는 한국인에게 저주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이런 중압감을 그녀가 다행히 이겨냈고, 이번 축구 국가대표팀도 국내에서 온갖 말이 횡행하는 가운데서도 선전을 펼치고 있다. 과거에 비한다면 요즘 젊은 세대는 ‘엄청난 기대감’이라는 괴물에 더 잘 저항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분명히 관계가 있다. 민주화 덕분에 아무리 큰 중압감 아래서도 “나는 나만 원칙에 맞게 열심히 하면 돼”라며 자기를 다독거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났다고나 할까.

적당한 기대는 선수를 분발시키지만, 과도한 기대는 사람을 얼린다. 일이든 운동이든 적당히 기대하며 즐기는 선진 방식을 배우도록 우리도 노력해보자. 주눅들지 않고 일하는 사회가 바로 선진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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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다람쥐처럼 공수 오가며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 하고도
골 먹은 상황에 대해서는 "내가 사람 놓쳤다" 분명히 인정.

경기 끝나고 그라운드에 두 주먹 묻고 꿇어앉은 그의 모습에서
인간적 성숙과 책임감을 본다.


우루과이와의 16강전 패배 뒤 이영표 선수. (연합뉴스 배재만 기자님이 찍은 사진입니다. 이런 도둑질 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이영표 선수 얘기를 하면서 현장 사진을 빼자니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한 컷 실례합니다. 넓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꾸벅 또 꾸벅)


우루과이에 1대2로 패한 새벽에 많은 분들이 눈물을 흘리셨지만 저도 눈물이 나더군요. 그리고 선수들의 눈물 중에서 가장 제게 눈에 띄는 것은 이영표 선수였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 선수 중 어느 선수가 가장 잘 했냐는 평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겠지만 저는 이영표가 가장 눈에 띄더군요. 

한국의 공격은 주로 그의 발끝에서 시작했고, 그의 날다람쥐 같은 패스와 돌파가 상대 선수의 반칙을 유발할 때 상대 문전에서 프리킥 찬스가 생겼고, 그래서 세트플레이로 점수를 따낼 수 있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세트 플레이 상황에서 골을 잘 차 넣어 주고 잘 받아 넣은 기성용, 이정수, 박주영 선수 등 모두 다 잘했고, 대단했지만, 그 단초를 열어 준 것은 박지성과 함께 이용표가 아니었냐고 돌이켜봅니다. 


공수를 다 뛰느라 후반이 되면 광부 같은 모습이 되는 선수

특히 그의 수비 기여는 대단하지 않았나요? 나이지리아 전 등에서 이용표에게 막혀 결정적 찬스가 무산되는 광경을 저는 꽤 여러 번 본 것 같습니다.

일본의 슈퍼스타 혼다 선수는 "난 수비는 하기 싫어 안 한다"고 했다지만, 수비는 귀찮고 힘든 일일 겁니다. 공격에는 영광이 따르지만 수비에는 굴육이 따르기 쉽잖아요?

이영표는 우루과이의 첫번째 골에 대해 "내가 수아레스를 놓쳐서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질 책임은 분명히 지겠다는 태도죠.

어떤 네티즌은 수비와 공격을 모두 하는 이용표의 모습을 "후반전이 되면 늙은 몸이 지쳐 꼭 탄광부 같은 모습이 된다"고 표현했더군요. 이렇게 죽어라고 뛰면서 잘못되면 '내가 실수했다'고 인정하고, 자신이 만든 프리킥 찬스를 후배들이 잘 차 성공시키면 그들과 함께 기뻐하는 태도는 인간적 성숙도가 높지 않으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잘했을 때 나서지 않고, 잘못하면 책임지는 그의 태도…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박지성 선수에게 주장 완장을 양보하는 것도 자존심 강한 사람에게는 쉽지 않았겠지만, 이렇게 '공은 양보하고 책임은 자기가 지는 태도'도 귀중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잘못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미루고, 자신은 모든 걸 잘했다고 미친 듯이 홍보하는 거짓말의 시대에는….

그는 우루과이전을 마친 뒤 우리 세대가 할 일을 이번 월드컵에서 해냈다”고 말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이미 4강 진출을 이뤄냈지만, 심판 매수 등의 시비가 많았고, 그래서 '자력 16강 이상 진출'을 자기 세대의 사명으로 생각했다는 소리지요.


'허접무' 감독과 함께 '진지하게 즐기는 축구'를 한 이들, 높이 평가해도 된다 
 

배재만 기자님. 딱 한 컷만 더 쓰겠습니다. "월드컵이니까" 특별히 용서해 주시리라 감히 믿어보겠습니다.


이영표의 16강전 패배 뒤 인터뷰에서 또한 기억에 남는 멘트는 “허정무 감독님이 유쾌한 도전을 이야기하셨는데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 지도자에게서 `월드컵을 즐기자'는 말을 들어보기는 처음이다"(연합뉴스 보도)는 부분이었습니다.

허 감독에 대해 허접무니, 친구의 아들만 스타팅 멤버로 기용한다느니 하며 말이 많았지만, 정말 그렇게 학벌-인정만 따져가며 대표단을 선발하고 선수를 기용했다면 이번 대회 같은 성적을 올릴 수 있었을지 궁금해지네요. 

한국인 감독으로서는 월드컵 같은 엄청난 무대에서 감히 할 수 없었던 바로 그 말, 즉 “월드컵을 즐기자”는 말을 허 감독이 앞장서서 하면서 선수들의 긴장감으로 굳어지기 쉬운 발을 풀어 줬기에 대표팀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상승 무드를 타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이런 게 다 새로운 변화고, 가능성을 엿보여 주는 모습들입니다. ‘허접무’ 감독의 전략이나 기용술에 크고 작은 불만들은 있겠지만, 불평만 하지 말고 좋은 측면도 봐야 하지 않을까요.

스포츠가 국가대항이 되니까 이렇게 난리가 나지, 원래 스포츠란 즐기자고, 정말 진지하게 재미있자고 하는 것 아닙니까? 진지하게 검토를 하는 건 좋지만, 비난을 하느라 재미까지 잃어 버리면 그건 정말 재미없는 짓이 돼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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