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속임수에 아기
-개 잘 속지만, 
늑대는 절대 안 속아

아기가 잘 속는 건 어른을 완전히 믿고 따르기 때문 

 

아기, , 늑대를 가지고 한 실험에서 늑대가 독자적 판단 능력이 최고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기와 개는 사람의 지시를 열심히 따르기 때문에 실험자가 속이면 영락없이 당하지만 늑대는 처음서부터 사람의 지시를 무시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정답을 맞췄기 때문이다.

 

헝가리 외트뵈스 대학의 아담 미클로시 교수 팀은 아기, , 집에서 기른 늑대를 갖고 실험한 결과를 저명한 과학지 사이언스’ 94일자에 실었다.

 

실험 방법은 상자 두 개를 마련하고 그 안에 먹을 것, 장난감 등을 넣어 놓고 아기, , 늑대 더러 찾으라고 한 것이다.

 

실험자는 처음엔 연거푸 A 박스에 물건을 넣고 아기, , 늑대에게 A 박스를 손짓하며 물건을 찾으라고 했다. 지시대로 쫓으면 되니 문제가 없었다.


속였을 때 늑대는 사람 무시... 아기-개는 실험자 뜻 따라

 

그러나 조금 있다가 실험진은 방법을 바꿨다. B박스에 물건을 넣고 A박사를 손짓하니 아기와 개는 열심히 A박스를 계속 헛되이 뒤졌지만 늑대는 안 그랬다.

 

늑대는 눈으로 보이는 증거를 토대로 A가 아닌 B 박스에 물건이 있다는 독자적 판단을 하면, 사람이 아무리 A박스를 손짓하건 말건 바로 B박스로 직행했다.

 

비록 사람에게 잡혀 사람이 기르고 있는 늑대였지만 야생에서 독자적 판단을 하며 살았던 기질 그대로를 물려받아 사람의 속임수에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여기까지의 실험에서 연구진은 1차 결론을 얻었다. 아기와 개는 사람의 지시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설사 지시하는 사람에 문제가 있어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었다. 반면 늑대는 사람의 지시를 따르는 동물이 아니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험자를 바꾸면 개는 안면몰수... 아기는 계속 실험자 뜻 따라  

 

연구진은 이어 실험에 약간의 변형을 준다. 실험하는 사람을 바꾼 것이었다.

 

ㄱ이라는 사람이 실험을 주재하다가 ㄴ이라는 사람으로 주재자가 바뀌자 아기, , 늑대의 반응은 서로 달랐다.

 

늑대는 처음부터 사람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실험자가 바뀌건 말건 아무 영향을 받지 않았다.

 

개는 실험 주재자가 바뀌자 새로운 사람이 계속 A 박스를 손짓해도 더 이상 따르지 않고 늑대처럼 자신의 판단을 따르기 시작했다.

 

앞 전 실험자는 주로 물건을 A 박스에 넣고 A 박스를 손짓했지만, 사람이 바뀐 이상 똑 같은 행동을 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독자적 판단에 따르겠다는 듯한 자세였다.

 

반면 사람의 아기는 우직했다. 실험자가 바뀌건 말건 A 박스에 물건이 있다고 손짓하면 설사 B 박스에 물건이 있다는 시각적 정보가 일부 존재하더라도 계속 A 박스만 뒤졌다. 계속 허탕을 치면서도.

 

개는 한 사람에게 배우고, 아기는 모든 사람에게서 배운다
 

이런 행동의 결과를 연구진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개에게는 사람과의 11 관계만 중요할 뿐, 어른(개에게 사람은 어른) 전체로부터 배울 필요는 없다. 즉 배우는 정보를 일반화해 모든 상황에 맞는 정보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 아기는 어른 전체로부터 배운다. 연구진은 아기는 어른과의 11 관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른 전체로부터 여러 지식을 배워 그것으로 넓은 세계를 인식하는 일반적 정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어른을 무조건 믿고 따르도록 프로그램 돼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른이 맘만 먹으면 아기들 얼마든지 속일 수 있어
 

이렇게 사람을 잘 따르는 게 인간의 아기이기 때문에 어른은 아기를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 늑대와 비교하면 늑대는 처음부터 사람의 교육이란 게 먹히기 힘들고, 개는 한 사람에게는 속아도 모든 사람에게 속지는 않지만, 아기는 어른 일반에게 끊임없이 속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어른을 믿게 돼 있기 때문에.

 

여기서 중요한 관점이 하나 나온다. 얘들을 가르치는 대로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기들을 망치려면 엉터리 가짜 교육을 시키면 된다. 그대로 믿고 따라오니까.

 
한국 어른들은 한국 아기들 교육 제대로 시키고 있나?

진화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저서에서 여러 번 지적했듯 종교인들은 우리에게 어린애를 다오라고 항상 외친다. 어린이 성경학교 등등이다. 그러면서 종교인들은 말한다. “우리에게 어린이를 주면 뼛속까지 철저한 종교인을 만들어내겠다.

 

여기서 문제 하나. 한국의 집단적 어른들은 자라나는 새싹들을 잘 가르치고 있는가? 친구-세상과 돕고 살도록 가르치는가, 아니면 무찌를 적으로 여기도록 가르치고 있는가?


<책 읽는 북손탐의 재밌는 동영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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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줄세우기로 냉혹현실 매일 경험하는 한국 청소년들
젊은이들의 꿈을 이렇게 짓밟는 나라가 어떻게 잘 될 수 있을까


한국에서 했어야 할 실험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듯 싶은 미국에서 했네요. 학생들의 꿈을 꺾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지를 연구했답니다.

 

연구는 어떻게 해야 학생들이 꿈을 접느냐는 거고, 연구의 목적은 학생들의 기를 일부러 꺾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연구한 교수도 학생들의 꿈을 꺾지 않게 조심한다고 말했으니까요.

 

과정도 흥미로운 실험 내용을 한번 볼까요?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의 패트릭 캐롤 교수 팀은 대학원 학생 모집 광고를 냈습니다. 경영심리학이라는 새로운 석사 과정을 개설한다고 광고를 내면서 졸업하면 고소득이 보장된다고 구라를 쳤답니다. 물론 이런 과정이 생길 계획은 없었고 실험을 위해 지어낸 거랍니다.

 

고소득이라는 광고에 쏠려 많은 학생이 지원했죠. 연구진은 지원 학생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들의 꿈을 꺾어 보려 노력했답니다.

학생들의 희망을 꺾으려 노력해 봤더니...

 

첫 번째 그룹에는 넌 학점이 모자라 안 된다고 공갈을 쳤답니다. 각 학생이 제출한 학점보다 단 0.1학점 위가 커트라인이라고 통보한 거죠. 예컨대 학점이 3.3점인 학생에게는 커트라인이 3.4점이다. 0.1점만 학점이 좋았어도 됐을 텐데라고 약을 올린 것입니다.

 

두 번째 그룹은 약간 더 높은 강도로 통보를 받습니다. “너는 학점도 안 되는 데다가 자질도 별로기 때문에 입학할 수 없다고 자질시비를 걸은 것이죠.

 

마지막 세 번째 그룹은 다른 차원의 방해를 받습니다. “이 과정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너는 제대로 마치지 못할 것이며, 설사 겨우 마친다 해도 실력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경영심리 전문가로 활동 못 하고 일반 회사에 취직해 허접스런 사무나 보면서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을 것이라고 겁을 준 것이죠.

 

이렇게 겁을 주면서도 연구진은 학생들에게 일말의 기대를 품도록 하는 트릭을 하나 섞어 넣습니다. “넌 기본적으로 안 되지만 입학 사정관이 무른 사람이니까 혹 모른다는 암시를 준 것이죠.

 

이렇게 각기 다르게 통보를 한 뒤 연구진은 학생들을 만나 꿈을 얼마나 접었는지를 살펴 봤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첫 번째
, 두 번째 그룹 학생들은 학점이 모자라 안 된다’ ‘넌 자질이 안 된다라고 통보해 줬는데도 불구하고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통보 전보다 오히려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의 시력

이런 결과에 대해 연구진은 여러 사실 중 자기에게 이로운 정보(입학 사정관이 무르다는)만 받아들이고 나머지(학점, 자질)는 무시하는 인간의 특징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용감무식하게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면서 절대로 꿈을 접지 않는 특징을 사람은 갖고 있다는 것이죠
.

 

그러나 냉혹한 현실에 대해 들은 세 번째 그룹 학생들은 달랐습니다. 고생해 봐야 쥐꼬리 월급을 받을 코스라면 진학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일찌감치 희망을 접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연구진들은 젊은이들이 꿈을 접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심어 주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연구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참 미국 사람들은 안 해도 될 연구를 하는구나하는 싶더라구요. 냉혹한 미래를 보여 주면서 젊은이들의 기를 확실하게 꺾는 나라는 한국만한 데가 없기 때문이죠.

한국의 학교 = 꿈을 짓이기기 위한 공간?

 

반에서 성적 순으로 줄을 세우는 것도 모자라 전국 모든 학생들을 반드시 줄을 세우고야 말겠다고 날뛰는 태도는, 어린 학생들에게 냉혹한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려는 것 말고는 도대체 무슨 목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겨례신문에 칼럼을 쓰는 김현진 씨의 그래도 언니는 간다라는 책을 보면 그녀가 다니던 여고에서는 출석도 성적 순으로 불러 공부 못하는 애들에게 창피를 주고, 또 청소는 공부 못 하는 애들에게만 시켜 장래의 쓰라릴 경험을 미리 시키는 배려까지 하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일이 선진국에서 벌어지면 바로 소송감이고 사법부가 정의를 찾아 주겠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기대도 못합니다. 답답해 미칠 노릇이죠.

 

어른들이 이렇게 청소년의 기를 죽이지 못해 발악을 하는 나라는 정말 한국 말고는 찾기 힘들 것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애들 기를 죽여서 뭘 얻으려는 건지 알 수 없습니다. '말 잘 듣는 바보들'이 수구꼴통들에겐 바람직한 인간상인가 보죠?

 

이렇게 모든 국민을 멍청이 만드는 교육을 하면서도 공익광고는 너의 코리아는 나의 코리아보다 나을 것이다라는 거짓말을 합니다. 냉혹한 현실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자라 모든 꿈을 접어 버린 사람들이 만드는 나라가 어떻게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겠습니까?

참 한심한 현실이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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