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타 사태에 이어 현대기아차 연비 사과광고를 보면 한국, 일본과 다른 미국 문화를 느끼게 된다.

 

1995년 일본계 미국 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신뢰(Trust)’란 책을 내놓아 한국인의 속을 뒤집어놓은 적도 있지만, 어쨌든 화제가 됐던 이 책의 주제는 미국-일본-독일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회기 때문에 잘 될 수밖에 없고, 한국-중국-인도는 불신을 바탕으로 한 사회이기 때문에 결국 망하게 돼 있다는 것이었다.

 


상호신뢰가 기본인 미국, 불신이 근본인 한국


실제로 미국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은 신뢰를 그 바탕으로 한다. 세금을 예로 들면 한국에선 알아서 속여서 신고하고, 세무서도 이를 다 알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세무조사 않는다지만, 미국에선 각자 알아서 성실신고하고 이를 세무서가 기본적으로 믿어주지만 탈세 사실이 당국의 눈에 적발되는 순간 반 죽여 놓는다로 정리할 수 있다.

 

불신을 기반으로 하고 그래서 속이는 게 다반사인 한국에서야 연비 정도 좀 부풀린 것은 별 문제가 안 된다. 관료와 언론에 기름칠을 잘 해놓기만 하면 소비자가 아무리 울부짖어도 그저 동네 개짖는 소리 정도다.

 

반대로 신뢰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는 자동차 회사가 밝히는 데이터를 기본적으로 믿어준다. 정부 공인 연비를 담당하는 연방 환경청도 그래서 현대기아차가 제공하는 연비 자료를 기본적으로 믿어줬을 것이다.

 

이렇게 신뢰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는 원칙이 확실하다. 믿음의 토대를 흔드는 행동, 즉 거짓말에 대해서는 일벌백계로 아주 확실하게, 지은 죄보다 몇 배로 갚아준다는 것이다.



신뢰사회의 기본은?   "거짓말의 크기에 상관없이 거짓말 하면 죽인다" 


믿어주는 사회는 비용이 적게 든다. 일일이 의심하고 검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의심하는 사회는 비용이 많이 든다. 일일이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몇년째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신뢰를 기반으로 한 사회는 자칫하면 큰일난다. 속이는 놈이 많아지면 전체적으로 시스템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불신 사회는 어차피 의심하기 때문에 속이는 놈이 좀 늘어도 괜찮다. 


그렇기에 신뢰 기반 사회는 거짓말 하는 놈을, "아주 보란듯이 죽여놓는" 시스템을 갖출 수밖에 없다. 거짓말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그 거짓말의 크기와 상관없이 확실히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현대기아차는 연방 환경청과 미국 소비자에게 일단 확실하게 찍힌 셈이다. 앞에서 세금 얘기를 했지만, 미국에선 일반 시민들도 집에 영수증 통을 놓고 몇 년치 영수증을 모두 모아둔다. 만에 하나 국세청에서 조사가 나올 경우에 대비해서다.

 

기업이건 개인이건, 연방 국세청은 평소에는 신고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만, 일단 이상한 점이 발견돼 조사에 나서면 '반 죽을' 각오를 해야 하기에 일반 서민도 이렇게 영수증 모으기를 한다.

 


별 것 아닌 것 갖고 훅 갈 수 있는 미국은 한국과 달라


토요타 사태를 보라. 페달의 사소한 작동 이상이 한국이나 일본에서라면 그렇게 토요타라는 거인을 휘청거리게 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겠는가? 그냥 쓱삭쓱삭 조용히 넘어갈 일이었다.

 

사태 전 토요타에 대한 미국인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줄을 서야 살 수 있는 게 토요타 차였다. 그러나 “이것들이 속이네”  “속일라고 덤벼드네라는 평가가 내려지는 순간 그 업체는 아주 뿌리째 뽑힐 각오를 해야 하는 게 미국 시장이다.

 

한국에서 배운 못된 버릇이 미국에서도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현대기아차의 행동거지는 정말 문제가 많다. 사실 올해초부터 현대차의 연비가 이상하다는 지적은 소비자로부터 꾸준히 제기됐다.

 

이에 현대기아차가 좀더 발빠르게 대처했더라면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기아차의 좀더 확실한 현지화가 이뤄져야 할텐데, 한국에서 정권-관료와 짝짜꿍하면서 배운 못된 버릇을 쉽게 버릴 것 같지 않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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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자가 틈만 나면 심판에 대한 불신감 부추겨
"인간의 한계까지 포용하는 게 스포츠"라는 사실 되새겨야


국제적인 경기를 한국 방송으로 보면 경험하게 되는 특이한 현상이 있다. 바로 심판에 대한 불신의 멘트들이다. “오늘 심판이 이상합니다” “아, 심판이 저러면 안 되죠” 등등.

근본적으로 심판의 자질을 의심하거나, 또는 심판이 매수당했다, 어느 한쪽 편만을 든다는 의혹을 표현하는 발언들이다.

국제 경기를 보면서 한국 팀을 응원하는 한국 관중들 입장에서는, 심판이 아무리 공정하게 경기를 진행해도, 응원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 편에 파울을 줄 때마다 심판에게 반감을 갖기 쉽다. 인간의 본성이다.

열광적으로 한쪽 편을 드는 관중에게 장내 아나운서 또는 TV 중계자가 “심판이 저러면 안 되죠”라고 발언하는 순간, 그 심판은 린치의 대상이 되기 쉽다. 관객의 공분이 그 심판에게 쏠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심판에 대한 의혹의 마음이 개인적으로 들더라도, ‘공정한 해설자’를 자처하는 TV 해설자 등은 이를 함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게 원칙이다. 그런 면에서 과연 한국 방송의 해설자들이 이런 자질을 갖췄는지는 의문거리다.

이번 동계 올림픽의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 결승에서 한국 여자 팀이 세계 신기록을 작성하고도 실격패당한 장면은 억울하기 짝이 없다. 심판이 잘못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본다면 그 심판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결정했을 것이다.

한국에 일곱번 편파 판정한 심판이 올림픽 결승전 심판 될 수 있나

이 심판에 대해 한국의 신문·방송들은 경기 당일은 물론 그 다음날까지도 “김동성을 탈락시킨 바로 그 호주 심판” “한국 팀에만 여태껏 일곱 번 편파 판정을 한 그 심판”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 결과는? 서울 주재 호주 대사관에 대한 폭파 협박과 대피 소동이었다. ‘심판=국가대표=정부기관’이라고 착각하는 폭파 협박범의 의식도 웃음거리지만, 이런 행동을 원격 조종한 책임은 언론에도 있다.

생각해보자. 그 호주 심판이 한국 팀에게만 일방적으로 일곱 번씩이나 편파적인 판정을 지난 8년 간에 걸쳐 해왔다면 국제심판 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충분히 자격을 갖췄기에 가장 중요한 결승전의 심판을 맡은 것 아닐까?

인간의 한계까지 포함하는 게 스포츠의 정신

미국의 스포츠 중계방송을 보면, 아나운서나 해설자는 철저하리만큼 중립적인 발언만 한다. ESPN처럼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만이 아니다. 지역 시청자만 보는 지방방송도 아나운서·해설자는 철저히 중립이다.

경기장 청중이 광적 흥분 상태인 대학농구(NCAA 농구)를 중계할 때도 지방방송 중계자들은 관객석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철저히 중립을 유지한다. “아니, 우리 동네 방송이 왜 저 모양이야?” “저 사람들은 화도 안 나나?”라는 야속한 생각이 들 정도이다.

미국 방송은 비디오 판정으로 분명히 심판의 잘못이 드러나는 순간에도 심판을 비난하지 않는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그게 스포츠다’라며 심판을 보호한다.

박지성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는가. 최선을 다 하지만 인간의 실수까지도 포용되는 게 바로 스포츠·축구의 세계라고….

불신사회에 살지만, 근거없는 불신 증폭은 말아야

심판의 편파 판정에 대해 한국인이 특히 민감한 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 근본적으로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사회’에 살기 때문에 먼저 의심부터 하는 데 익숙하고, 또한 그간 심판 매수 스캔들을 끊임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지난 1월에는 천신일 대한레슬링협회장이 ‘박연차 게이트’로 재판을 받던 중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국제 심판들에게 돈을 건넸다”는 폭탄발언도 했다. 국제적 망신거리지만, 국내에서는 조용히 넘어갔다.

사사건건 심판 판정에 대해 ‘국민적 공분’을 표출하는 한국인에게, 그리고 그 분노에 기름을 퍼붓는 한국 언론에게 외국인들이 “뭐 눈에는 뭐만 뵌다”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심판의 부당한 판정에 대해서는 적법한 경로를 통해 문제점을 제기하고 재발을 막으면 된다. 그게 바른 길이다. 인간사·세상사에 대해 많은 걸 배우게 해주는 무대가 스포츠다.

이렇게 좋은 스포츠를 하고, 보면서 ‘심판은 근본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믿으면 우리만 손해다. “심판이 저러면 안 되죠”라는 한국 방송만의 멘트가 사라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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