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에서야 비로소 '상놈 패션' 멋지게 완성. 
이후 드라마들, 최소한 그 만큼은 해 줘야 보지



'추노'는 여러 모로 의미있는 드라마였다.

따라서 적어도 앞으로 나오는 사극 드라마는 추노의 수준과 엇비슷하거나, 더 뛰어나 줘야 한다.

'추노'와 '지붕킥'이란 시대에 획을 그은 드라마 두 편이 거의 동시에 끝나 버려, 영 섭섭한 가운데, 최근 새로 시작한 드라마들을 보면서 '차마 눈을 둘 데가 없어서' 한 마디 하련다. 

오늘은 간단히 사극의 복장에 대해 한 마디 해 보자. 나는 패션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극 속의 등장인물이 입고 나오는 옷은 극의 내용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추노의 복장은, 특히 하층 상놈들의 복장은 정말로 압권이었다. 

추노의 곽정한 PD가 주간지 '시사인' 3월13일자에 한 인터뷰의 한 내용을 보자.


"굉장히 후져 보이는데 멋있는 옷을 만들자고 했다. 나뭇잎의 녹색, 초가집의 갈색, 바위의 회색, 육체들의 살색 정도로 의상의 색감을 한정하고, 대신 재료의 질감으로 멋스러움을 살렸다. 네다섯 번씩이나 워싱하면서 노비들의 의상 제작비가 양반 옷보다 몇 배 비싸졌다."


이 말을 듣고 드라마를 보면 "과연~"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슬픈 사랑의 여인, 설화의 옷을 보자.



남사당 패에 있을 때만 해도 그녀의 복장은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복이었지만, 대길이 패에 가담한 뒤에는 복장이 달라진다. 머리에 두른 헝겁, 닳아 빠진 웃도리, 펑퍼짐한 막치마가 그녀 패션의 전부지만, 가슴 저리도록 슬픈 사랑을 하는 그녀의 복장은 곽 PD의 말대로 회색, 갈색, 살색 등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복장만으로도 처절한 사랑이 묻어나는 듯 하다. 




곽 PD가 '사실 상의 주인공'이라고 한 업복이의 복장은 또 어떻고. 마구 구멍이 뚫린 머리띠에 남루한 노비 복이 전부지만, 색깔 배합은 한 마디로 절묘하다. 약간씩 짙고 옅음이 교차되면서, 하이패션 저리 가랄 정도의 멋을 뽐낸다. 




이 드라마에서 또 한 명의 아련한 여인, 초복이의 복장도 마찬가지다. 남루하지만 초록과 옅은 노랑을 주조로, 자연에 녹아들어갈 듯한 색깔로 옷을 만들어 줬다. 


'드라마를 위해 금방 만듯 옷'이란 사실 보면서 드라마 보기 힘들어

이렇게 '추노'가 사극 복장에도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는데, 그 뒤 시작된 사극 드라마를 보면 복장에서부터 실망이다. 양반 복장은 둘째로 하더라도, 천민의 복장이 너무 '날림'이다. '드라마를 위해 금방 만든 옷'이라는 게 너무 눈에 잘 보인다. 

드라마 '동이'의 소녀 시절 복장.

드라마 동이의 천민 복장.


드라마 만드는 분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이건 실제가 아니라 드라마야'라는 걸 보는 시청자에게 일깨우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면, '추노 이후 시대'에는 최소한 천민의 복식에서만은 추노 수준 비슷하게라도 해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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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가 기다려지는 수요일이다.

추노는 한국 드라마사에 획을 그은 작품이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나에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인물의 성격 규정이다. 


선인-악인 구분 무의미하게 만든 드라마 '추노'


이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의 성격은 한 마디로 꼭 집어 선인-악인으로 나눌 수 없다. 


도망 노비를 괴롭히는 더러운 추노꾼 이대길(악)은 잡은 추노를 때로 놓아 주기도 하고(선), 

돈만 아는 시장판의 야비한 인물(악), 천지호는 자기 꼬붕들의 원수를 끝까지 갚아 주려 하며(선), 

스스로 노비 출신이면서도(출신이 선), 노비를 혐오하는(악) 언년이,  

항상 올바른 일만 할 것 같은(선) 최장군도 큰주모의 '달걀박이 밥'은 거절하지 않으면서 음심을 드러내고(악) 등등. 

즉, 정치 모리배들, 문자 쓰는 양반들을 제외하고는 선과 악을 오가는 경계선 위에 사는 인물들이다.


사실 실제로 사람 사는 모습이 이러하다. 사람을 '이 사람은 피부부터 뼈 속 깊이까지 착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온 몸이 독이 가득 찬 악마'라고 규정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특히 장바닥에서 생존투쟁을 하며, 울부짖는 '추노'의 상놈들(현대의 보통 한국 사람들)에게 선과 악이란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 오로지 의미있는 단어는 생존일 뿐.
 

한치 앞을 모르고 사는 한국인에겐 '한치 앞을 모르는 드라마'가 호흡 맞는다? 

'추노'가 한국 드라마에 굵은 획을 그은 이후, 이제 등장인물 성격이 고정된 드라마가 보기 힘들다.

예컨대 SBS 드라마 '제중원'이 그렇다. 착한 백정 출신 의사, 황정은 항상 착한 일만 하고(미련스러울 정도로), 양반 출신 의사 백도양은 항상 악인 역할을 맡는, 이 드라마는 도대체 성격의 긴장감이 없다. 


에피소드는 있되, 성격은 미리 완벽하게 정해져 있고, 결말도 뻔하니 도대체 싱거워서 채널을 고정할 수가 없다. 

'추노' 이후의 이런 느낌은 KBS의 새 드라마 '부자의 탄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에피소드야 있겠지만, 첫 회를 몇 분만 봐도 '한국 드라마의 정해진 룰'이 눈에 뵌다.
 
여주인공이랄 이보영은 처음엔 극히 까칠한 재벌 딸이지만 급격히 여성화되면서 현재는 호텔 벨보이에 불과하지만 결국 성공할 지현우의 여자가 될 것이며 등등 그야말로 '안 봐도 비됴'다. 


이제 '추노 이후 시대'에 한국 사람들은 이런 드라마 답답해서 못 본다. 뻔해서 싫다. 

사극도 잇달아 나오는 모양인데, 사극에서도 이런 양상은 되풀이되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안 봐도 비됴'인 드라마로 인기 끌려는 드라마, 이제 안 돼

과거 '허준' '장희빈' '명성황후' 등은 '다 아는 스토리'면서도 그들의 성공 또는 패망기를 길고도 긴 호흡으로, 에피소드와 함께 보여 주는 형식으로 당시 한국인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때만 한국인의 호흡이 지금보다는 길었기에 그런 현상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사람 사는 모습을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그러나 현재, 한국인의 호흡은 가쁘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바로 몇 달 전만 해도 한국 경제가 완전히 거덜나는 것처럼 무서워 공포에 떨었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간단다.

그러나 이 역시 또 모른다. 한국 경제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해 전국의 주요 정치인이 대부분 '토건족'으로 분류되는 이 나라에서, 미분양 아파트의 폭증으로 대변되는 '토건-부동산 붕괴 양상'은 곧 무서운 양상을 띌지도 모른다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즉,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숨가쁜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으며, 이러한 한국인의 삶의 호흡은 '천천히 관조하는' 감상법을 갖기 힘들게 만든다. 


'시각'을 바꿔 다오…궁중 안 소꿉장난은 이제 그만

'추노 이후'에 드라마는 이제 시각을 완전히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닌지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사극이라도 과거처럼 '궁중의 소꿉장난'을 보여 주는 것으로는 더 이상 눈길을 받을 수 없으며, 완전히 다른 시각(예컨대 추노가 시장바닥으로 내려갔듯)에서 시대나 사건-인물을 조명해야 눈길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다. 


새로운 스토리보다는 새로운 '시각'이 더 중요하리라는 관점에서, 올해 한국 드라마의 흥망을 지켜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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