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가 기다려지는 수요일이다.

추노는 한국 드라마사에 획을 그은 작품이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나에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인물의 성격 규정이다. 


선인-악인 구분 무의미하게 만든 드라마 '추노'


이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의 성격은 한 마디로 꼭 집어 선인-악인으로 나눌 수 없다. 


도망 노비를 괴롭히는 더러운 추노꾼 이대길(악)은 잡은 추노를 때로 놓아 주기도 하고(선), 

돈만 아는 시장판의 야비한 인물(악), 천지호는 자기 꼬붕들의 원수를 끝까지 갚아 주려 하며(선), 

스스로 노비 출신이면서도(출신이 선), 노비를 혐오하는(악) 언년이,  

항상 올바른 일만 할 것 같은(선) 최장군도 큰주모의 '달걀박이 밥'은 거절하지 않으면서 음심을 드러내고(악) 등등. 

즉, 정치 모리배들, 문자 쓰는 양반들을 제외하고는 선과 악을 오가는 경계선 위에 사는 인물들이다.


사실 실제로 사람 사는 모습이 이러하다. 사람을 '이 사람은 피부부터 뼈 속 깊이까지 착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온 몸이 독이 가득 찬 악마'라고 규정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특히 장바닥에서 생존투쟁을 하며, 울부짖는 '추노'의 상놈들(현대의 보통 한국 사람들)에게 선과 악이란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 오로지 의미있는 단어는 생존일 뿐.
 

한치 앞을 모르고 사는 한국인에겐 '한치 앞을 모르는 드라마'가 호흡 맞는다? 

'추노'가 한국 드라마에 굵은 획을 그은 이후, 이제 등장인물 성격이 고정된 드라마가 보기 힘들다.

예컨대 SBS 드라마 '제중원'이 그렇다. 착한 백정 출신 의사, 황정은 항상 착한 일만 하고(미련스러울 정도로), 양반 출신 의사 백도양은 항상 악인 역할을 맡는, 이 드라마는 도대체 성격의 긴장감이 없다. 


에피소드는 있되, 성격은 미리 완벽하게 정해져 있고, 결말도 뻔하니 도대체 싱거워서 채널을 고정할 수가 없다. 

'추노' 이후의 이런 느낌은 KBS의 새 드라마 '부자의 탄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에피소드야 있겠지만, 첫 회를 몇 분만 봐도 '한국 드라마의 정해진 룰'이 눈에 뵌다.
 
여주인공이랄 이보영은 처음엔 극히 까칠한 재벌 딸이지만 급격히 여성화되면서 현재는 호텔 벨보이에 불과하지만 결국 성공할 지현우의 여자가 될 것이며 등등 그야말로 '안 봐도 비됴'다. 


이제 '추노 이후 시대'에 한국 사람들은 이런 드라마 답답해서 못 본다. 뻔해서 싫다. 

사극도 잇달아 나오는 모양인데, 사극에서도 이런 양상은 되풀이되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안 봐도 비됴'인 드라마로 인기 끌려는 드라마, 이제 안 돼

과거 '허준' '장희빈' '명성황후' 등은 '다 아는 스토리'면서도 그들의 성공 또는 패망기를 길고도 긴 호흡으로, 에피소드와 함께 보여 주는 형식으로 당시 한국인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때만 한국인의 호흡이 지금보다는 길었기에 그런 현상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사람 사는 모습을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그러나 현재, 한국인의 호흡은 가쁘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바로 몇 달 전만 해도 한국 경제가 완전히 거덜나는 것처럼 무서워 공포에 떨었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간단다.

그러나 이 역시 또 모른다. 한국 경제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해 전국의 주요 정치인이 대부분 '토건족'으로 분류되는 이 나라에서, 미분양 아파트의 폭증으로 대변되는 '토건-부동산 붕괴 양상'은 곧 무서운 양상을 띌지도 모른다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즉,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숨가쁜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으며, 이러한 한국인의 삶의 호흡은 '천천히 관조하는' 감상법을 갖기 힘들게 만든다. 


'시각'을 바꿔 다오…궁중 안 소꿉장난은 이제 그만

'추노 이후'에 드라마는 이제 시각을 완전히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닌지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사극이라도 과거처럼 '궁중의 소꿉장난'을 보여 주는 것으로는 더 이상 눈길을 받을 수 없으며, 완전히 다른 시각(예컨대 추노가 시장바닥으로 내려갔듯)에서 시대나 사건-인물을 조명해야 눈길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다. 


새로운 스토리보다는 새로운 '시각'이 더 중요하리라는 관점에서, 올해 한국 드라마의 흥망을 지켜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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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짓기 부당하게 방해 받았는데 화도 안 나나?

한국 드라마 여주인공 성격 설정 좀 제대로 하자

 

사람들이 드라마를 최면 걸리듯 보는 이유는 사람 사이 이야기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둘러 앉아 하는 얘기의 대부분이 남 이야기라는 연구 결과에서도 사람이 얼마나 사람 사이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보여 준다.

 

흔히 가십으로 표현되는 남 얘기가 사람들에게는 너무 재미있는 것이고, 이런 재미를 TV라는 매체를 통해 집 안으로 보내 주는 게 바로 드라마다.

진풍-수진의 뛰어난 연기가 드라마 재미 높여

 

현재 시청률 2위라는 KBS솔약국집 아들들은 배우들의 좋은 연기(특히 진풍 역의 손현주와 수진 역의 박선영)로 재미를 주는 드라마다. 그러나 지난 번 포스팅에서도 지적했듯 등장 인물의 지나친 부르주아화는 좀 우스운 대목이기도 하다.

 

복실(제니퍼 김, 유선 분)을 그냥 의대 나왔다라고 해도 될 텐데 꼭 세계 최고 의대 중 하나인 존스 홉킨스를 나왔다고 뻐겨대는 거나, 또 대풍이 그냥 좋은 의대 나왔다고 해도 될 텐데 서울 의대 수석 졸업이라고 겁을 주는 게 좀 작위적이라는 것이다.

지난 포스팅: ‘솔약국집’ 등장인물 직업, 모두 짱짱한 이유있다

 

지난 회에서 진풍이 프러포즈하고 수진이 거절하는 커피샵 신에서 배우 손현주와 박선영은 멋진 연기를 보여 줘 극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들었다.

 

떠듬거리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진풍의 촌스럽지만 진솔한 사랑, 그리고 본마음은 아니지만 눈물을 머금은 표정으로 대차게 거절하는 수진 모두 명연기를 펼쳤다.


똑똑한 여자 변호사가 왜 여자 망신 시키려 하나?
 

그러나 이들이 이런 명연기를 펼치게 된 상황, 즉 장래의 시어머니가 반대해 수진이 마음에도 없는 거절을 하게 된다는 사정은 역시 또 한번 지나치게 작위적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수진은 변호사, 즉 똑똑한 여자인데, 장래 시어머니의 말도 안 되는 요구(“진풍은 빨리 결혼해야 하는데 너는 오빠의 자식을 돌봐야 하는 것 아니냐)에 굴복해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면서 남자의 진솔한 사랑을 매몰차게 거절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앞으로 얼마든지 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젊고,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자(수진)라서 나이 많고 어눌하고 잘 생기지도 않은 남자(진풍)의 사랑을 받아들일까 말까 하는 상황에서 장래 시어머니가 말도 안 되는 강요를 하자, “그래, 내가 미쳤지라고 정신이 퍼뜩 들고 청혼을 거절하는 것이라면 시청자가 아쉽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현실감은 있겠다.

 

그런데 좋아하면서도, 어차피 맺어질 것이면서도 잠시 극적인 재미를 위해 여자를 이렇게 희생시키고, 멍청한 여자로 만든다면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다.

짝짓기 전략 방해 받아도 화도 안 나는 여자는?

 

진화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두 사람이 다 짝짓기 과정에서 방해를 당한 것인데 짝짓기 전략에 방해를 받으면 남자나 여자나 다 화를 내게 마련이다. 진풍은 그래서 화를 낸다. 엄마가 놀라도록. 한번도 엄마에게 대든 적이 없던 큰아들이.

 

반면 수진은 이게 뭐냐? 왜 짝짓기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부정 당했는데도 화도 못 내고 숨어서 울기나 하고, 화가 났다는 낌새도 주변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여자라서? 이건 말이 안 된다. 이렇게 줏대 없는 역할을 맡기려면 변호사가 아니라 변호사 사무실에서 커피 심부름하는 아가씨로 역할을 배정하던지.

드라마틱 하면서도 현실감 있는 여배우 설정 왜 안되나?

 

사실 한국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의 성격 설정이 엉망으로 되는 게 거의 항상이었지만 이제 좀 바뀔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섹스 앤 더 시티가 그렇게 인기 있었고 속편을 만든다니까 지금 배역을 누가 맡냐고 미국 사람들이 떠들썩한 이유가 무엇인가?

여자 주인공들의 성격 설정을 제대로 했고, 그리고 드라마니까 드라마틱하면서도 또한 맞아 저런 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게끔 현실감을 살렸기 때문 아닌가?

 

우리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은 대개 여주인공에 비하면 있을 법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자 주인공들은 그렇지 못하고 에이, 저게 아니잖아또는 저런 여자가 어딨냐?”라는 말이 튀어나오게 만든다.

 

여주인공은 환상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리얼틱하면 안 되나? 아무리 현실과 동떨어진 동화 속 이야기 같은 드라마라지만 이제 좀 땅에 발을 좀 디디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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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 이제 '캐릭터 유지' 좀 하자

 

결혼 못 하는 남자. 일본 드라마 중 최고 재미있게 본 드라마 중 하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리메이크에 대해 우려를 했고 1, 2회가 지나면서 우려와는 달리 한국 스타일을 잘 살린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결혼 못하는 남자에 대한 성격 규정이 탄탄히 돼 있는 일본 드라마 덕에 초반에는 재미있게 봤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결국 평범한 한국 드라마로 바뀌니 실망스럽군요.

 

한국 드라마 라는 건 온갖 작위적인 상황을 만들어가면서 결국 결혼으로 골인하는 과정을 집요하게 보여 준다는 의미입니다.

 

'결혼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 말고는 할 얘기 없나?

결못남이라는 드라마의 의미는 결혼 못하는 남자의 성격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남자만이 하는 이상한 짓들'을 재미있게 보여 준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앞두고
하나 마나라며 고민하는 것은 모든 남자의 기본 특징이기 때문에 이를 코믹하게 보여 줘 성공한 드라마죠.

 

그래서 일본 드라마의 주인공 남자는 끝까지 자신의 캐릭터를 유지하고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점을 남겨 놓은 채 끝납니다. 남녀 주인공의 성격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상상의 여지를 남겨 놓은 채 끝나는 것이죠.

 

그런데 한국판 리메이크는 이런 상상의 여지를 끝까지 하나하나 밟아 없애 버렸습니다. 결혼 못할 남자의 성격을 실컷 보여 주더니 결론은 그 둘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다가 된 것입니다.

이런 결론을 보여 주려고 결혼 못할 남자의 특징을 그리 자세히 보여 줬던가요?

 

뜬금없는 성격 변화는 이제 그만 좀 하자

한국 드라마의 이러한 캐릭터 변경은 진짜 지겹습니다. 씩씩하고 남자에 주먹을 날리는 성격으로 시작한 여주인공은 꼭 남자 주인공과의 사랑에 휘말리면서 눈물을 쥐어짜는 신파조 여성으로 바뀌는 게 한국 드라마의 전형입니다.

 

극작가들에게 당부하고 싶습니다. 제발 캐릭터를 한번 설정했으면 끝까지 좀 밀고 나가 보세요. 대개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들은 캐릭터가 유지되지만 여자 주인공들은 극 초반에는 독특한 성격이었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보고 또 본 바로 그 드라마 주인공이 돼 버립니다.

 

눈물 짜는 여자를 보여 주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 짜는 모습을 보여 주세요. 그리고 성격이 변할 거면 그럴만한 장치를 만들던지. 왜 아무런 계기도 없이 결못남이 결혼 못해 안달을 떠는 남자가 돼버립니까?

이제 한국도 개성 시대고 개성파라야 살 수 있습니다. 다양한 한국인의 캐릭터가 골고루 드라마에 나와야지 왜 보고 또 본 스테레오 타입(전형)만 자꾸 화면에 내보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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