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 “오륙도는 태종대 앞인데…왜 부산 지형이 바뀌었지?” 소동


부산에서의 첫 행선지는 오륙도 스카이워크로 정했다. 부산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부산에서 차를 몰면 공중으로 붕붕 날아다니는 느낌이다. 특히 유명한 영도대교를 구경하며 지나간 뒤 곧바로 부산항대교의 아찔한 ‘공중 램프’ 위로 올라갈 때는 나이든 일행이 “아래를 내려보지마, 위험해” “오금이 저려” 등을 외치며 오락기구라도 탄 듯한 재미를 느꼈다. 



오륙도를 향해 가는 도중에 문현동이란 지명이 나오자 ‘강원북도’(북한에 속한 강원도의 북단을 우스갯소리로 부르는 말)가 고향이신 어머니는 “육이오 동란 통에 서울 동덕여중 3학년 1학기 때 부산으로 피난 온 적이 있고, 그때 살았던 곳이 문현동”이라고 처음 듣는 얘기를 해주셨다. 가족여행은 이렇게 가족의 가슴 속에 숨겨진 사연을 끄집어내는 효과도 있는 듯하다. 감수성 예민한 


소동은 오륙도 해맞이공원에 도착해 벌어졌다. “바로 앞에 보이는 작은 섬들이 오륙도”라는 할아버지-할머니 2인조 관광안내원의 안내에 대해 어머니가 “여기가 태종대이지요?”라고 묻는 것으로 소동은 시작됐다. 


어머니의 기억 속 오륙도는 분명 태종대 앞이 분명한데, 할아버지-할머니 안내원은 “어데요, 여기는 태종대가 아니라예”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어머니는 “어머나, 부산 지형이 어째 이상해졌네. 오륙도는 분명 태종대 앞에 있었는데…”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안내 2인 조는 빙긋이 웃으며 “피난 때 얘기하시는갑다"고 말을 받았다. 정신없던 피난 시절에 부산에 잠시 살았던 사람들이 그렇게 착각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던 듯 싶다. 이어 일행은 “아무리 세월이 지났다고 해도 부산의 땅이 움직였겠느냐"고 농담들을 하면서 깔깔 웃는 시간을 가졌다. 


원래 계획은 스카이워크를 걸어보는 것이었으나, 어제 남해 금산 ‘등반’으로 무릎이 피곤해진 어머니의 사정으로 해맞이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오륙도를 배경으로 해를 향해 두팔을 뻗치면서 사진을 한 장 박는 것으로 오륙도 구경을 마치고 바로 다음 행선지로 고고씽~~.



◇“부산 살았었지만 국제시장은 처음이야”와 함께 한 유부 주머니


이어서 찾은 곳은 부산의 초대형 시장통인 국제시장. 오전 시간에 어묵 국물을 맛보기 위한 순서였다. 


국제시장의 ‘사이즈’를 잘 모르는 일행은 내비게이션에 ‘국제시장’이라고 치고 찾아갔지만 차를 댄 곳은 어묵골목과는 상관없는 옷 골목이었다. 


“이 주차장은 국제시장 근처가 아닌가봐요?”라고 말했다가 주차장지기에게 “여기가 죄다 국제시장 아임니까”라는 호통을 들은 뒤에 차에서 내린 일행은 옷 골목을 한참이나 지나 겨우 어묵 골목을 찾고는 “국제시장이 크긴 정말 크구나” 하고 한 번 더 감탄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어묵 좌판 앞에 옹기종기 앉은 일행은 어묵국물과 떡볶기를 한 상 푸짐하게 차려놓고, 특히 ‘유부 주머니’라는, 타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쉽지만은 않은 앙징맞은 아이템을 놓고 후루룩짭짭 맛있는 간식 타임을 가졌다. 


한때 문현동에서 피난살이도 했었다는 어머니는 “부산에 살아도 봤지만 국제시장에 온 건 처음”이라면서 “국제시장은 피난 시절에도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미제 물건 등을 판매하는 곳이라 했으니 어린 내가 찾아올 일은 없었다”고 했다.


일행이 어묵 맛을 보는 옆으로는 중국인 아가씨 2명이 찾아와 막 튀겨지는 튀김을 가리키며 “이거 이거 맞아요?”라면서 핸드폰 번역기를 이용한 결과인 듯 ‘오징어’라고 크게 쓰인 핸드폰 화면을 들이보이면서 물어봤다. 여기가 국제적인 곳이 맞긴 맞나보다ㅎ~



◇벽돌과 라인의 아기자기한 조화…그리고 향긋한 커피향


둘째날 부산 일정의 하이라이트는 브라운핸즈백제 카페 방문이었다. 한국의 카페라면 죄다 온통 그냥 미국풍 멋밖에 없는 듯다. 최신식 컬러풀로 번쩍번쩍하고…. 


이름이 브라운핸즈로 시작하는 곳인지라 “가죽 같은 걸 만들던 공장인가”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름 맨 끝에 백제가 들어간 걸 보고는 “백제와 돈독했던 일본인들이 백제와의 옛관계를 생각해 부산 한복판에 백제라는 이름이 들어간 건물을 지었나?”는 생각을 하면서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건물 외관부터 실내까지를 벽돌로 마감한 모습, 그리고 실내의 별난 각도와 아기자기한 평면 구조, 그리고 평면에 높낮이를 준 아이디어 건축물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실내에서는 사진빨이 살아날 수밖에 없다. 조금씩 색조가 다른 벽돌마다의 차이가 눈으로 보는 것보다 사진에서는 훨씬 더 아기자기한 배경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의 이 건물에 대한 설명서를 보니 ‘내부 평면이 사각형, 마름모꼴 형태의 다양한 실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최초 건립되었던 1, 2, 3층에는 목조 계단과 장식, 디테일 등 목재로 마감된 원형이 잘 남아 있음’이라고 돼 있다. 


현대 건물의 내부 평면은 죄다 사각 격자형이다. 공간을 최대한 사용하는 데는 이런 형태가 최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의 100년 전에 지어진 이 건물(1922년 완공)은 마름모꼴에 동그라미까지 동원했고, 또 1층의 가운데 부분은 위로 솟아 있다. 좌우 양측으로는 19세기 풍 목제 계단을 살짝 돌아내려가게도 돼 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한때 중국인이 이 건물을 인수해 청요리집 ‘봉래각’을 운영하면서 좌우 양측 공간을 요리 대접 방으로 이용했다고도 한다. 



이런 감각, 즉 공간 활용도만을 생각하지 않고, 실내에 ‘아티스틱한’ 계단을 설치하고 평면의 높낮이를 다르게 하는 설계, 즉 요즘 말로 하자면 ‘쓸데없이’ 멋을 부리느라고 ‘돈 되는’ 공간을 낭비하는 행태야말로, 구시대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돈과 효율성에 치이며 사는 현대의 한국인에겐 이런 공간이 정겹다. 공간을 낭비해도 좋고, 쓸데없이 멋을 낸 서너 단짜리 계단을 돌아내려가면 어떤가? 낭비하더라도 즐길 수만 있으면 좋지 않으냐는 옛사람들의 멋스러움이 그리워진다. 



둥글게, 마름모꼴로 돌아가는 공간은 우리를 왜 기분좋게 하나? 


복잡한 공간이 주는 심리적 효과에 대해선 홍익대 건축학과 유현준 교수의 책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아주 좋은 글귀들이 있다.  


마당 있는 주택이 넓은 평수의 아파트보다 더 넓어 보이는 이유는? 마당이 계속해서 바뀌기 때문 (…) 변화가 없는 아파트에서 살기 때문에 더 TV를 바라보게 되는 것 (…) 공간은 결국 기억(193쪽)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는 이야기 (…) 기억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 (…) 공간을 크게 느끼게 하려면 시간을 길게 느끼게 해야 하고, 시간을 길게 느끼게 하려면 기억할 사건을 많이 만들어줘야 한다.(290쪽) 


일본 건축의 특징 중 하나는 제한된 3차원 공간 안에 보행자 동선을 복잡하게 넣어서 좁은 공간을 넓게 보이게 만든다는 것(350쪽) 



모든 것이 격자형으로 규격화된 도시에 사는 21세기 한국인들에게는 이 같은 변화와 굴곡, 일부런 복잡하게 만들어넣은 공간 기획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간이 있다면 유 교수의 말대로 TV와 스마트폰을 덜 들여다보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브라운핸즈백제 카페는 반갑고, 유 교수의 말대로 “공간은 결국 기억”이므로 쉽게 잊힐 것 같지 않은 공간의 추억이 될 것 같다.  


서울에도 이런 방식의 건물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대형으로. 바로 일제 식민 총본부로 쓰인 중앙청 건물이었다. 일제 강점 이후 조선총독부가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에 의뢰해 1912년부터 설계를 시작했고, 저명한 일본인 건축가 등이 참가하면서 완공(1926년)까지 무려 14년이 걸린 기념비적 건물이었다. 


이 총독부 신청사는 당시 일본의 본토와 식민지를 포함해 가장 큰 건물이었으며 동양 최대의 근대식 건축물이었다고 한다.(위키피디아 참조)


비록 일본이 조선 식민지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건물 안쪽에 ‘日’자형 평면을 배치하는 등, 한민족으로서는 뼈아픈 기억이 서린, 서슬퍼런 건물이었지만, 그래도 문화사적 가치가 충분한 건물이었다. 


그런데 고 김영삼 대통령은 민족정기를 살린다며 이 중앙청 건물을 당시 엄청난 돈을 들여가면서, 쓰레기 치우듯 철거해버렸다. 



서울의 중앙청은 거액 들여 철거…부산의 옛백제병원 건물은 멋지게 재탄생


일제강점기에 아마도 일본인 건축가의 설계와 기술로 지어졌을 구백제병원 빌딩이 21세기의 한국인에게 이처럼 그윽한 옛 정취를 심어준다면, 21세기 세계 10대 부국 중 하나로 올라선 한국이, 20세기초 신흥강국으로 올라선 일본이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 14년이나 걸려 지은 문화재급 건물을 지금 보유하고 있다면, 우리가 일본인에게 “너희가 한때는 우리를 지배하면서 이런 만행까지 부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멋진 나라를 만들어, 너희 후손들에게 너희 선조들이 정성껏 만든 건물을 일견(一見)케 허하노라”면서 관광을 허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중앙청 건물이 경복궁을 가로막은 것을 본 일본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이었다니"하며 자신의 조국 일본을 수치스러워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박유하 저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38쪽), 총독부 건물의 위치나 구조가 한민족에게 치욕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의 역사일진대, 그렇게 쓰레기 치우듯 자취도 안 남기고 내버린다는 것은 박유하 교수의 말대로 "우리 것이 아닌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하는 한국적 사고방식의 소산"(위 책 38쪽)이 아닐 수 없다. 


중앙청이라는 쓰레기를 치운 뒤 한민족의 정기는 살아났나? 그렇다면 왜 철거(1995년) 뒤 불과 2년만에 나라가 거덜나는 IMF 외환 위기를 맞았을까? 



일본인이 만든 건물을 다 부셔야 민족정기가 살아난다면 왜 도쿄역과 똑같은 모습으로 지은 서울역사는 보존되어야 하는 건물로 지정되고, 현재 ‘문화역서울 284’라는 이름의 멋진 미술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더 큰 돈을 서울역 등 일제가 손댄 모든 건물을 부수지 않아서 IMF 외환 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쩝…. 


각설하고, 일제강점기 시대의 건물은 많이 철거됐지만 아직도 부산을 필두로 군산 등지에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은 이를 ‘철거됐어야 하는데 아직 남아 있는’ 건물로 생각한다. 이런 피식민지 근성을 극복하는 모습의 하나를 브라운핸즈백제 카페에서 본 것 같아 반가웠다. 


지금은 정겨운 이 건물이 한때는 일본군 장교의 숙소로, 부산치안사령부 건물로 쓰였다고 한다. 그러니 이 빌딩 앞을 지날 때마다 조선인들은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번영도, 과거의 그 몸서리도 다 우리의 역사다. 어떻게 인간이 과거 나쁜 경험과 일을 컴퓨터 파일 지우듯 삭제할 수 있겠는가? 


부산은 일제강점기에 가장 많은 재(在)조선 일본인이 살았던 땅이다. 그리고 부산은, 일본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란 망상을 꿈꾸면서, 1930년대에 일본열도부터 조선반도, 만주국을 거쳐 중국 일부와 멀리 동남아시아까지를 연결하는 제국의 중심부로 삼았던 철도와 해운의 중심지였다. 


일부 분야에서는 서울을 능가하는 경험을 일제강점기에 했던 도시가 바로 부산이고, 그것이 부산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일본제국의 돈도 엄청나게 투하된 곳이고, 당시의 근대건물도 아직 많이 남아 있을 게다.


브라운핸즈백제처럼 이런 유산을 슬기롭고 멋있게 바꿔놓는 노력을 부산에서 지속적으로 펼친다면, 부산이 비단 바다만 좋은 곳이 아니라 근대 역사를 음미하고 회상할 수 있는 명소로 또한번 떠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북행(北行) 길에 올랐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따뜻한 남쪽바다여, 안녕~~^^.



링크: 이런 변이 있나? 따뜻한 남쪽바다에서 ‘12월의 단풍’ 맛보고, 100년 전 건축미에 취하다 [첫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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