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재미없다. 그리고 콘셉트가 말이 안 된다. 뭐하러 타임스퀘어 가서 홍보 하고, 쑈 하고 그러나?  그런다고 뉴욕 사람들이 코방귀나 끼나?

뉴요커들이 미국의 의사를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거리를 걸어다니는 사람일 뿐인데....  

내가 뉴요커라면 뜬금없이 나타나 "한국의 뭘뭘 아느냐"고 묻는 외국인 코메디언이 있다면 귀찮기 짝이 없을 것 같다.

뉴욕 같은 세계 도시에는 사실 세계의 모든 것이 다 있다. 내가 살던 LA에도 아르메니아인 마을이 따로 있고, 또 태국 마을이 따로 있는 등 세계 사람이 모여 사는데.... 외국 문화가 뭐 그리 미국 대도시 사람에게 신기해 뵈겠는가?

도심 한복판에서 한국 홍보 한다고 쑈 해 봐야 그냥 불쌍할 뿐이다. "얼마나 후진 나라, 문화길래 저렇게 가두 홍보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만 들고...  

현지 홍보도 일본을 좀 배워라. 미국에서 열리는 여러 외국 행사 중 가장 인기 좋은 게 일본 관련 행사다. 중국 행사도 그 다음으로 인기 있는 것 같고....   아프리카 행사는 특이해서 인기 좋고....

일본 사람들은 '무한도전'처럼, 뜬금없는 돌발 쇼 하지 않는다. 가령 '일본 문화 주간'을 설정하면, 미국 기관하고 협력해 몇 달 전부터 준비하며, 그러면 미국의 '일본 광'들은 그 행사에 자원봉사를 못해 안달이다. 

그러면 행사는 '일본에서 온 일본인 +  미국에 사는 일본인 + 일본에 환장한 미국인'이 공동 주최하는 행사가 된다. 현지 미국인들이 적극 참여하므로 홍보도 절로 되고, 관람객도 많다. 

뉴욕타임스에 '엄청난 돈을 내고' 비빔밥 광고 내고, 독도 광고 내고.... 다 웃기는 얘기다. 그런 광고가 도대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하겠는가?

미국에서 인기 있는 일본 관련 행사들은 수십년 묵은 것들이 많다. 장난스레 '난장 식'으로 하는 게 아니다. 뉴욕타임스 광고처럼 일회성도 아니다.

연 만들기 같은 주제를 잡아 몇년이고 몇 십년이고 꾸준하게 행사를 진행하면 미국인 애호가들이 절로 생기고 그 도시가 자랑하는 문화재가 된다. 이렇게 꾸준한 행사는 현지에서 행사비 조달도 되기 때문에, 뉴욕타임스 광고처럼 '생돈'을 들일 필요도 없다.

무한도전은 그간 몇번 미국에 가서 잔재미는 봤지만, "이제 그만"이다. 다른 방송도 마찬가지다. '한국 좀 알아 주세요'라는 구걸 좀 그만 하자.

문화나 홍보라는 게 구걸로 되는 게 아니고, 우선 상대방을 감질나게 하는 맛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명지대 '여러 가지 문제 연구소'의 김정운 교수는 한식과 일식의 차이를 '너무 푸짐하게 내 줘서 다시 만날 필요가 없는 여자'와 '항상 모자라게 주기 때문에 꼭 다시 만나야 하는 여자'로 절묘하게 비교했다.

마찬가지로, 뉴욕 사람들에게 푸짐하게 퍼주기, 이제 좀 그만 좀 해라. '문화 구걸' '홍보 구걸'이 창피하지도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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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는 '13명이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면 그 중 한 명은 죽는다'는 미신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와 12제자가 식사를 하고 있다.


다 같은 미신끼리 왜 그래?


13일과 금요일이 겹치면 ‘13일의 금요일’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13일의 금요일은 기독교적인 미신이라고 할 수 있다.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13일의 금요일에 대한 미신을 정리해 봤다.

12를 신성한 숫자로 보는 전통은 동양의 12지신, 그리스-로마 신화의 올림푸스산 12신 등에서 드러나듯 그 뿌리가 깊다.

그리고 이런 뿌리를 이어받은 기독교 문화가 이스라엘의 12부족, 예수의 12사도, 1년 열두달, 오전-오후는 12시간 등으로 12라는 숫자를 신성시한다.

12를 신성하게 치는 이런 전통은 12를 넘어서는 13을 조화를 깨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숫자로 본다.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어선 숫자로 보는 시각이다.

13은 원래 서양 민간신앙에서 신성한 숫자였는데, 기독교의 12가 민간신앙의 13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13이 불길한 숫자로 몰렸다는 해석도 있다.


12를 신성시하는 전통에 “금요일은 부정” 기독교 미신이 결합

이런 기독교적 전통에 금요일을 부정한 날로 보는 시각이 가세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요일이 금요일이라는 설이 등장하고, 이런 설은 예수의 마지막 만찬에 참가한 사람이 13명(예수+12사도)이라는 사실과 결부되면서 공포감을 증폭시킨다.

노르웨이 신화에도 13명이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면 그 중 한 사람이 반드시 죽는다는 내용이 있다.

도대체 금요일이 왜 불길한 요일이 됐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북구 신화를 거론하는 학설이 있다. 북구 신화에 사랑과 잉태의 여신 ‘프리가’가 있는데, 이 프리가 여신의 이름에서 영어의 금요일(Friday)이 나왔다는 설도 있다.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토속 신앙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프리가 여신은 마녀로 강등된다. 그리고 프리가 여신이 매주 금요일마다 마녀 11, 악마 1명과 모여 모두 13명이 나쁜 일을 꾸민다는 민속신앙이 생겨난다.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템플기사단이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을 마구 살해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 '다빈치 코드'의 한 장면.


스페인어 문화권에서는 ‘13일의 화요일’이 불길

13일의 금요일 관련 이론 중 최근 널리 알려진 것은 2003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다빈치 코드’를 통해서다.

이 소설에는 중세의 기독교 전통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템플 기사단(Knights Templar) 얘기가 나오는데, 십자군전쟁을 계기로 점점 더 힘이 세지는 템플기사단을 박멸하기 위해 프랑스의 필립 왕이 1307년 10월13일 금요일에 템플기사단을 급습해 몰살시키도록 명령한 뒤 ‘13일의 금요일’이 악명을 떨치게 됐다는 설이다.

그러나 템플기사단의 몰살과 관련될 설은 20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며, 20세기 이전 문헌에는 템플기사단 몰살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13일의 금요일을 부정한 날로 보는 전통이 특정 지역의 전통이라는 사실은 같은 유럽문명이라도 스페인어 문화권에서는 금요일보다는 화요일을 더 불길한 날로 친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런 전통은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5월29일 화요일에 오토만 제국에 의해 멸망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스페인어 문화권에서는 13일의 금요일이 아니라 ‘13일의 화요일’을 불길하게 본다.

 

<따박따박 읽어내는 북손탐의 재밌는 동영상들>




고흐가 미쳤다고? 이렇게 맨정신인데? 

고흐는 열정만의 화가라고? 책을 이렇게나 많이 읽은 지식인인데? 

우리가 잘못 배운 빈센트의 진면모!



메시와 호날두 중에 누가 좋냐고? 

난 단연코 호날두!! 

왜냐고? 인간적이잖아!! 

동양인 비하하느라고 눈찢는 메시가 좋으니? 

호날두는 저런 천박한 짓 말라고 메시 같은 것들한테 아래위로 찢어주잖아.   


"아래위로 눈 찢어진 야만인들아!"라면서



돈에 구애받지 않고 사는 법이 있다고라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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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관심-비난으로 선수들 기죽이는 한국 문화에서
히딩크가 문연 '서양식 리더십'이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뿌리내리면서 사상 첫 원정 16강 이룬 것. 
 




중앙일보 6월 24일자는 1면 톱으로 한국 팀을 16강으로 이끈 박지성의 ‘비움의 리더십’을 다뤘다. 이 기사를 보니 2002년 히딩크 감독 당시의 일화도 생각난다.

히딩크가 보기에 당시 국가대표팀의 선후배 관계는 너무 엄격했고, 그래서 히딩크는 “지금부터 무조건 반말”을 지시했다. 김남일이 홍명보 주장에게 “명보야, 밥 먹으러 가자”고 했다는 얘기는 지금도 유명하다.


르헨티나에 대패한 다음 날, 박지성의 리더십… "형은 달라"

그리고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주장 박지성은 아르헨티나에게 대패한 다음날 굳어 있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일일이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후배들에게 농담을 건네 분위기를 바꿨다고 한다. 박주영은 박지성에 대해 “형은 친구처럼 느껴질 정도로 스스럼없이 대해준다”고 말했다.

2002년과 2010년의 이 두 일화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히딩크나 박지성이 하는 방식이 바로 ‘서양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박지성은 오랜 영국 생활을 통해 익혔을 것이다.

서양식 상하관계를 많은 한국인이 오해하지만, 존댓말이 없다고 해서 그들의 관계가 이른바 ‘야자 타임’ 식은 아니다.

윗사람은 지시하고 아랫사람은 따르는 상명하복이 서양에도 있지만, 그 근본에는 합리주의·원칙이라는 게 있다. 이런 원칙만 지켜지면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친구처럼 지내도 좋다는 게 서양식이다.



한국의 '공포를 기반으로 한 통치' 방식이 효과적일 때도 있지만 

물론 한국식, 즉 ‘윗사람은 책임감을 느끼며 찍어 누르고, 아랫사람은 입 닥치고 무조건 복종하는’ 방식이 반드시 나쁘다는 건 아니다. 때로 이런 방식은 엄청난 돌파력을 자랑한다. 한국인이 잘하는 ‘돌관 공사’(1년 걸릴 공사를 단 몇 개월에 해치우는)는 한국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이제 경제든, 운동이든, 옛날식으로 ‘선수들을 시멘트 바닥에 갈아대 처벌하는’ 방식으로는 이끌어 나갈 수 없다. 특히 스포츠는 ‘재미있고 진지하게 논다’는 유희성이 없으면 성립이 되지 않는다.

한국이 지난 월드컵들에서 수없이 고배를 마실 때 어떤 외국인 비평가는 “한국 선수들이 ‘국민의 과도한 기대감’이라는 중압감 없이 가뿐하게 뛸 수 있다면 더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생각해보자. 온 국민의 시선이 당신의 발을 쳐다보고 있고,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가차없이 비난이 쏟아질 준비가 돼 있는 상태에서, 당신이라면 발이 얼어붙지 않겠는가를.




민주주의 자리 잡으면서 "나만 원칙대로 하면 돼" 더 확산돼야 

지난 동계 올림픽 때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앞두고 미국인 해설가들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연아가 한국인의 기대에 못 미치면 그녀는 한국인에게 저주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이런 중압감을 그녀가 다행히 이겨냈고, 이번 축구 국가대표팀도 국내에서 온갖 말이 횡행하는 가운데서도 선전을 펼치고 있다. 과거에 비한다면 요즘 젊은 세대는 ‘엄청난 기대감’이라는 괴물에 더 잘 저항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분명히 관계가 있다. 민주화 덕분에 아무리 큰 중압감 아래서도 “나는 나만 원칙에 맞게 열심히 하면 돼”라며 자기를 다독거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났다고나 할까.

적당한 기대는 선수를 분발시키지만, 과도한 기대는 사람을 얼린다. 일이든 운동이든 적당히 기대하며 즐기는 선진 방식을 배우도록 우리도 노력해보자. 주눅들지 않고 일하는 사회가 바로 선진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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