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전을 펼쳐놓고 고민 중인 상앙을 묘사한 조각.(사진=위키피디아)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뒤 그간 큰 화두는 ‘국정원 대선개입’이었다. '머리가 깬' 사람에게는 국정원 대선개입처럼 큰 문제가 없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서민에게는 국정원 대선개입 문제는 그저 정치적 다툼일 뿐이었다. “여태껏 국정원이 그보다 더 한 일도 많이 했는데 그게 뭐 그리 대수냐”는 반응이다.
 
국정원 문제로 정치권과 서울광장이 들썩거려도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60% 위를 달렸다. 잘난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렇게 무지몽매한 국민이 있을 수 있나”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채동욱 문제도 마찬가지다. 잘난 이들의 싸움일 뿐, 보통 국민에게는 그저 찻잔 위의 태풍일 뿐이다.
 
국정원-채동욱은 ‘찻잔 위의 태풍’, 복지후퇴는 ‘찻물 얼리는 냉각’
 
그러나 ‘진영 장관의 사의’로 대표되는 복지공약의 후퇴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다. 국정원-채동욱이 찻잔 위의 태풍이라면, 복지공약 후퇴는 찻잔 물이 식는 사태다.
 
사실 작년 대선에서 ‘유신 부활’ 등의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1번을 찍었던 사람들이 뭘 바랐겠는가. 수도권에 아파트라도 한 채 가진 사람들은 ‘아파트 값을 그래도 민주당보다야 새누리당이 더 잘 지켜주겠지’라는 일념으로 캥기는 바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1번을 찍은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아파트가 없는 사람은 ‘박근혜가 되면 그래도 박정희 대통령이 그랬듯, 비록 독재를 좀 하더라도 서민들 입에 따뜻한 밥이 들어가도록 해주겠지’라는 기대로, 마치 공주를 여왕으로 떠받드는 자세로 1번을 찍었을 게다.
 
박근혜 대통령을 반대편에서는 ‘유신공주’라고 깎아내리기도 하지만, 실제로 공주 같은 측면이 있다. 한국 서민들이 공주를 사랑한 것은, 공주가 ‘재벌-관료 복합체’의 탄생을 지켜본 주인공이었기 때문이었다.
 
재벌-관료 복합체는 한국 서민의 숨통을 죄는 괴물이 됐다. 외국서 돈을 벌어와 나라를 살찌게 하는 줄 알았던 재벌이 순대-떡볶이 집까지 하면서 내 숨통을 죄는 괴물로 확인이 됐으며, 관료는 국민행복은 아랑곳 않고 재벌에 이로운 정책을 구사하다가 퇴임 뒤 재벌의 고위직으로 옮겨가는 행태에 이른바 ‘궁민’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런 재벌-관료 복합체를 깰 적임자로 민주 인사보다는 ‘공주’를 택한 것이 지난 대선의 결과였다. 노무현 정권을 뽑아도 별일이 없다는 걸 본 ‘궁민’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재벌-관료 복합체 깨라고 1번 뽑았는데…”
 
현대 한국의 재벌-관료는 박정희 대통령 때 만들어졌다. 그 탄생 과정을 아는 만큼 공주님은 이들을 깨부수는 데, 즉 이들이 당초의 ‘애국적-민족주의적’ 자세로 돌아가게 만드는 데 적임자라고 생각하게끔 선거 캠페인이 진행됐다. 작년 총선-대선에서 김종인 전 경제수석이 내놓은 ‘경제민주화’가 내내 화두가 됐던 이유다.
 
한 마디로, 국민들은 ‘어느 정도는 독재를 하더라도 제발 살게 해달라’고 박 대통령을 뽑은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현재까지 나온 정부의 기초노령연금, 영유아 무상보육 후퇴를 보면 ‘여왕’이 재벌-관료 복합체에 굴복한 모양새다. 현재의 정부안대로라면, 50대초가 넘어서도 국민연금을 성실히 납부하는 사람은 결국 기초노령연금에서 손해를 보기 때문에, 50대초가 되면 국민연금에서 빠져나와 민영보험으로 갈아타게 돼 있고, 이는 곧 재벌의 이익이 된다. 재벌에 이익이 돼야 고위 관료들의 은퇴 후 복지가 해결된다. 진영 장관의 사의는 이러한 그림에 대한 반발인 셈이다.
 
‘왕’에 대한 서민의 신뢰는, 중국 대륙에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이래 ‘자애로운 왕에 대한 신뢰’라는 그림이 만들어지면서부터다. 자애로운 왕이,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귀족-종교사제를 때려잡는 모양새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실질적으로 일궈낸 상앙(商鞅)의 법가(法家)가 천하의 지지를 받은 것은, 상앙이 귀족의 특권을 박탈하고, 심지어 왕자가 잘못해도 법으로 다스렸기 때문이다. 귀족-왕족(현대 한국으로 치면 재벌-관료)의 특권을 빼앗은 것이 대륙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뼛속깊이 새겨진 ‘자애로운 왕’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
 
비록 진나라는 단명(15년)했지만, 진나라가 만든 모델, 즉 ‘왕은 귀족을 제압해 백성을 돌본다’는 이상은 이후 중국 모든 왕조의 이념이 됐으며, 이는 현대 중국의 공산치하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조선왕조 500년 장수도 이런 이념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집권세력이 그 무슨 짓을 해도, ‘궁민’을 보살필 수만 있으면 세력을 유지할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의 18년 독재가 보여준 증거다.
 
반대로, 왕이 귀족-사제를 이기지 못하거나, 심지어 결탁한 것으로 드러나면, 그때 맹자의 역성혁명 사상이 나온다. ‘옳지 못한 왕은 백성(실제론 새로운 귀족)이 갈아치워도 괜찮다’는 사상이다.
 
이런 생각은, ‘아시아적 전제정치’를 진나라 이후 지금까지 2234년 동안 몸으로 겪으면서 동양인의 뼛속깊이 새겨진 생각이다. 이를 정면으로 어기는 게 이번의 복지후퇴 정책이다. 박근혜 정부는 “앞으로 경제사정이 좋아지면 공약을 지키겠다”고 하지만, 정권 첫해에 일그러진 정책이 되살아나는 경우는 있기 힘들다.
 
정부의 복지후퇴 안이 국회로 넘어온 뒤, 이를 원상회복시키는 세력이, 그것이 민주당이 됐건 새누리당이 됐건, 국민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 진시황릉의 병마용. 진시항 사후에도 
중국인들이 '진나라 제도'를 따른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무력에 굴복해서? 아니면 황제와 법가-법치주의가 백성을 살려준다고 믿었기 때문에?(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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