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자가 틈만 나면 심판에 대한 불신감 부추겨
"인간의 한계까지 포용하는 게 스포츠"라는 사실 되새겨야


국제적인 경기를 한국 방송으로 보면 경험하게 되는 특이한 현상이 있다. 바로 심판에 대한 불신의 멘트들이다. “오늘 심판이 이상합니다” “아, 심판이 저러면 안 되죠” 등등.

근본적으로 심판의 자질을 의심하거나, 또는 심판이 매수당했다, 어느 한쪽 편만을 든다는 의혹을 표현하는 발언들이다.

국제 경기를 보면서 한국 팀을 응원하는 한국 관중들 입장에서는, 심판이 아무리 공정하게 경기를 진행해도, 응원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 편에 파울을 줄 때마다 심판에게 반감을 갖기 쉽다. 인간의 본성이다.

열광적으로 한쪽 편을 드는 관중에게 장내 아나운서 또는 TV 중계자가 “심판이 저러면 안 되죠”라고 발언하는 순간, 그 심판은 린치의 대상이 되기 쉽다. 관객의 공분이 그 심판에게 쏠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심판에 대한 의혹의 마음이 개인적으로 들더라도, ‘공정한 해설자’를 자처하는 TV 해설자 등은 이를 함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게 원칙이다. 그런 면에서 과연 한국 방송의 해설자들이 이런 자질을 갖췄는지는 의문거리다.

이번 동계 올림픽의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 결승에서 한국 여자 팀이 세계 신기록을 작성하고도 실격패당한 장면은 억울하기 짝이 없다. 심판이 잘못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본다면 그 심판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결정했을 것이다.

한국에 일곱번 편파 판정한 심판이 올림픽 결승전 심판 될 수 있나

이 심판에 대해 한국의 신문·방송들은 경기 당일은 물론 그 다음날까지도 “김동성을 탈락시킨 바로 그 호주 심판” “한국 팀에만 여태껏 일곱 번 편파 판정을 한 그 심판”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 결과는? 서울 주재 호주 대사관에 대한 폭파 협박과 대피 소동이었다. ‘심판=국가대표=정부기관’이라고 착각하는 폭파 협박범의 의식도 웃음거리지만, 이런 행동을 원격 조종한 책임은 언론에도 있다.

생각해보자. 그 호주 심판이 한국 팀에게만 일방적으로 일곱 번씩이나 편파적인 판정을 지난 8년 간에 걸쳐 해왔다면 국제심판 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충분히 자격을 갖췄기에 가장 중요한 결승전의 심판을 맡은 것 아닐까?

인간의 한계까지 포함하는 게 스포츠의 정신

미국의 스포츠 중계방송을 보면, 아나운서나 해설자는 철저하리만큼 중립적인 발언만 한다. ESPN처럼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만이 아니다. 지역 시청자만 보는 지방방송도 아나운서·해설자는 철저히 중립이다.

경기장 청중이 광적 흥분 상태인 대학농구(NCAA 농구)를 중계할 때도 지방방송 중계자들은 관객석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철저히 중립을 유지한다. “아니, 우리 동네 방송이 왜 저 모양이야?” “저 사람들은 화도 안 나나?”라는 야속한 생각이 들 정도이다.

미국 방송은 비디오 판정으로 분명히 심판의 잘못이 드러나는 순간에도 심판을 비난하지 않는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그게 스포츠다’라며 심판을 보호한다.

박지성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는가. 최선을 다 하지만 인간의 실수까지도 포용되는 게 바로 스포츠·축구의 세계라고….

불신사회에 살지만, 근거없는 불신 증폭은 말아야

심판의 편파 판정에 대해 한국인이 특히 민감한 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 근본적으로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사회’에 살기 때문에 먼저 의심부터 하는 데 익숙하고, 또한 그간 심판 매수 스캔들을 끊임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지난 1월에는 천신일 대한레슬링협회장이 ‘박연차 게이트’로 재판을 받던 중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국제 심판들에게 돈을 건넸다”는 폭탄발언도 했다. 국제적 망신거리지만, 국내에서는 조용히 넘어갔다.

사사건건 심판 판정에 대해 ‘국민적 공분’을 표출하는 한국인에게, 그리고 그 분노에 기름을 퍼붓는 한국 언론에게 외국인들이 “뭐 눈에는 뭐만 뵌다”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심판의 부당한 판정에 대해서는 적법한 경로를 통해 문제점을 제기하고 재발을 막으면 된다. 그게 바른 길이다. 인간사·세상사에 대해 많은 걸 배우게 해주는 무대가 스포츠다.

이렇게 좋은 스포츠를 하고, 보면서 ‘심판은 근본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믿으면 우리만 손해다. “심판이 저러면 안 되죠”라는 한국 방송만의 멘트가 사라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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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가 기다려지는 수요일이다.

추노는 한국 드라마사에 획을 그은 작품이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나에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인물의 성격 규정이다. 


선인-악인 구분 무의미하게 만든 드라마 '추노'


이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의 성격은 한 마디로 꼭 집어 선인-악인으로 나눌 수 없다. 


도망 노비를 괴롭히는 더러운 추노꾼 이대길(악)은 잡은 추노를 때로 놓아 주기도 하고(선), 

돈만 아는 시장판의 야비한 인물(악), 천지호는 자기 꼬붕들의 원수를 끝까지 갚아 주려 하며(선), 

스스로 노비 출신이면서도(출신이 선), 노비를 혐오하는(악) 언년이,  

항상 올바른 일만 할 것 같은(선) 최장군도 큰주모의 '달걀박이 밥'은 거절하지 않으면서 음심을 드러내고(악) 등등. 

즉, 정치 모리배들, 문자 쓰는 양반들을 제외하고는 선과 악을 오가는 경계선 위에 사는 인물들이다.


사실 실제로 사람 사는 모습이 이러하다. 사람을 '이 사람은 피부부터 뼈 속 깊이까지 착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온 몸이 독이 가득 찬 악마'라고 규정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특히 장바닥에서 생존투쟁을 하며, 울부짖는 '추노'의 상놈들(현대의 보통 한국 사람들)에게 선과 악이란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 오로지 의미있는 단어는 생존일 뿐.
 

한치 앞을 모르고 사는 한국인에겐 '한치 앞을 모르는 드라마'가 호흡 맞는다? 

'추노'가 한국 드라마에 굵은 획을 그은 이후, 이제 등장인물 성격이 고정된 드라마가 보기 힘들다.

예컨대 SBS 드라마 '제중원'이 그렇다. 착한 백정 출신 의사, 황정은 항상 착한 일만 하고(미련스러울 정도로), 양반 출신 의사 백도양은 항상 악인 역할을 맡는, 이 드라마는 도대체 성격의 긴장감이 없다. 


에피소드는 있되, 성격은 미리 완벽하게 정해져 있고, 결말도 뻔하니 도대체 싱거워서 채널을 고정할 수가 없다. 

'추노' 이후의 이런 느낌은 KBS의 새 드라마 '부자의 탄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에피소드야 있겠지만, 첫 회를 몇 분만 봐도 '한국 드라마의 정해진 룰'이 눈에 뵌다.
 
여주인공이랄 이보영은 처음엔 극히 까칠한 재벌 딸이지만 급격히 여성화되면서 현재는 호텔 벨보이에 불과하지만 결국 성공할 지현우의 여자가 될 것이며 등등 그야말로 '안 봐도 비됴'다. 


이제 '추노 이후 시대'에 한국 사람들은 이런 드라마 답답해서 못 본다. 뻔해서 싫다. 

사극도 잇달아 나오는 모양인데, 사극에서도 이런 양상은 되풀이되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안 봐도 비됴'인 드라마로 인기 끌려는 드라마, 이제 안 돼

과거 '허준' '장희빈' '명성황후' 등은 '다 아는 스토리'면서도 그들의 성공 또는 패망기를 길고도 긴 호흡으로, 에피소드와 함께 보여 주는 형식으로 당시 한국인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때만 한국인의 호흡이 지금보다는 길었기에 그런 현상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사람 사는 모습을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그러나 현재, 한국인의 호흡은 가쁘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바로 몇 달 전만 해도 한국 경제가 완전히 거덜나는 것처럼 무서워 공포에 떨었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간단다.

그러나 이 역시 또 모른다. 한국 경제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해 전국의 주요 정치인이 대부분 '토건족'으로 분류되는 이 나라에서, 미분양 아파트의 폭증으로 대변되는 '토건-부동산 붕괴 양상'은 곧 무서운 양상을 띌지도 모른다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즉,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숨가쁜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으며, 이러한 한국인의 삶의 호흡은 '천천히 관조하는' 감상법을 갖기 힘들게 만든다. 


'시각'을 바꿔 다오…궁중 안 소꿉장난은 이제 그만

'추노 이후'에 드라마는 이제 시각을 완전히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닌지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사극이라도 과거처럼 '궁중의 소꿉장난'을 보여 주는 것으로는 더 이상 눈길을 받을 수 없으며, 완전히 다른 시각(예컨대 추노가 시장바닥으로 내려갔듯)에서 시대나 사건-인물을 조명해야 눈길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다. 


새로운 스토리보다는 새로운 '시각'이 더 중요하리라는 관점에서, 올해 한국 드라마의 흥망을 지켜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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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더티한 모습 넘버 1 = 앰뷸런스 앞 버티는 승용차

한국인의 꼴불견 베스트 1쯤 되는 게 아마 앰뷸런스에 버티는 운전자의 모습 아닐까 싶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생각되는 것은 “도대체 왜 안 비켜 줄까?”다.

앰뷸런스 운전자가 장난을 치는 것 같아서? 장난 좀 치면 또 어떤가? 일년에 길에서 앵앵거리는 앰뷸런스를 도대체 몇 번이나 만난다고 그래, 그걸 못 비켜주고 앰뷸런스 앞을 자랑스레 달려가나 그래? 철면피에 강심장들 같으니라고, 쯧쯧.

길이 꽉 막혔을 때도 미국 차들은 비켜 주려 노력한다. 비켜줄 자리만 있으면 미국 운전자들은 앵앵 소리만 나면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비켜 준다. 너무 심하게 비켜 주다가 멀쩡한 차들끼리 사고가 날 뻔한 광경도 목격했었다.

미국에서 운전자의 상식이라면,

앵앵 소리가 난다
→ 바로 사방을 살펴 앰뷸런스의 위치를 확인한다
→ 내 뒤쪽에 앰뷸런스가 있으면 그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100%를 해서 차선을 비켜 준다,
이런 식이다.

한국 운전자들은 아마도 “야, 앰뷸런스야. 내 옆 차선도 비어 있는데, 니가 차선 바꿔 가며 달리면 될 것 아냐? 왜 존엄한 내가 비켜 줘야 돼”라고 생각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데, 참 촌냄새 풀풀에다가 비인간성 철철이다.

환자를 싣고 있는 차와 멀쩡한 차 중에서 어떤 차가 차선을 바꾸기 쉬운가? 앰뷸런스에서는 의료진이 안전벨트도 하지 못하고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데, 앰뷸런스가 곡예운전을 하면서 ‘속 내용물’이야 어떻게 되던 말던 달려가야 하는가? 멀쩡한 차들이 비켜 주면 보기도 좋고, 사람도 살릴 수 있어 좋지 않은가?

급기야 나온 아이디어라는 게 서울시가 ‘앰뷸런스 오토바이’를 운영한단다. 앵앵거리며 달려가는 한국 수도 서울의 앰뷸런스 오토바이…. 아 쪽 팔려.

이렇게 살면서도 TV만 켜면 국격이 어쩌저 저쩌고, 더 좋은 대한민국이니 어쩌니 하고 타령이다. 창피하다, 창피해, 정말.

학교에서 왜 그런 교육을 못 시키나? 앰뷸런스에 왜 비켜 줘야 하는지, 앰뷸런스의 1분, 1초가 사람 생명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영어-수학 가르칠 시간도 부족해서? 그래서 이 나라는 미친 나라라는 거다.

교육이라는 게 경쟁이란 측면도 있지만, 경쟁에 앞서 첫 번째는 가르칠 것은 ‘제대로’ 사는 방법 아닌가? 이 ‘제대로 교육’ 부분이 제대로 안 되면 결국 ‘똑똑한 사기꾼’ 만드는 교육밖에 더 되나?

제발 좀 비켜 줍시다. 창피한 것 아니에요, 자존심 상하는 것도 아니에요. 사람 살리는 일이라구요. 앰뷸런스에 자기 엄마, 자기 아버지가 타고 있어도 그렇게 여유롭게 “바쁘면 니가 비켜 가” 할 수 있나요?

제발, 이런 창피한 일부터 추방하고 그 다음에 국격이니, 코리아 브랜드니, 선진국이니, 더 나은 대한민국이니, 이런 얘기를 좀 합시다. 지킬 건 아무것도 안 지키면서 이런 얘기나 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 미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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